해야 시인의 시는 달과 바람, 산과 별, 꽃과 어둠이 서로를 부르며 길을 열어주는 동안, 화자는 그 길을 따라 “나”에게 돌아온다. 문명의 어휘를 가급적 배제한 채, 최소한의 단어로 정서와 사유를 응축하는 극도의 언어 절제미가 이번 시집의 미학적 핵심이다. 이 절제는 표현의 빈곤이 아니라 의미의 압축이다. 해야는 말수를 줄여 울림을 넓히고, 서사를 덜어 경계를 지운다. 그래서 독자는 한 편의 시를 읽고 나면 설명이 아니라 체험, 관념이 아니라 기척을 얻는다.
표제작이기도 한 「지음知音 1」은 이 시집의 정조를 맑게 울려 들려준다. “달이/떴어./네가/왔어.”에서 보듯 행과 행 사이의 여백은 호흡의 길이며 기다림의 틈이다. 달빛과 눈빛, 하늘과 가슴이 겹쳐지는 순간, 타인은 대상이 아니라 조응의 장이 된다. 자연에서 길을 찾기란 바로 이런 상호 울림의 사건이다. 기다림의 끝이 “달이었어./하늘이었어.”로 귀결될 때,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비움의 형식, 붙잡음이 아니라 맞아들임의 방식으로 다시 정의된다.
산과 별의 연작은 이런 시상을 확장한다. 「산 2」에서 산의 무게는 ‘더함’과 ‘내림’을 동시에 수행한다. “무게를 더해 주는/산의 무게./무게를 내려 주는/초록의 무게.” 자연은 삶의 짐을 떠맡아주는 대신, 그 짐을 감각하게 해 주는 스승이다. 이어지는 「산 6」에서는 “세상이 나를 훔쳐 갈까 봐” 산으로 도피하는 마음을 산이 되돌려 세운다. “산을 네게 두고 살아 봐.”라는 권유는 소유의 방향을 전환한다. 산을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산을 내면에 두는 일, 즉 소유를 비워 찾게 되는 존재의 전환이다. 잃어버린 정체성의 회복은 외부의 탈취를 막는 요새에서 오지 않고, 내부의 공간을 비워 타자와 세계가 거주하게 하는 환대에서 온다.
이 시집의 가장 큰 특징은 언어의 경제성이다. 「나 1」에서 명함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시인은 세칭과 행세를 벗기고 존재의 속살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새로운 화려한 어휘가 아니라, 덜 말하는 용기다. 「사랑 5」는 사랑을 둘로 쪼개는 논리를 단 한 줄로 무력화한다. “빛은 빛이라서/그림자가 없다.” 빛과 그림자, 둘인가 하나인가를 캐묻는 대신, 존재가 자기 이유로 충분하다는 점을 시인은 응시하고 있다. 결론을 과시하지 않고, 독자 속에서 결론이 자라도록 빈자리를 남겨두는 문장. 이 절제가 바로 해야의 미학이다.
꽃의 연작은 그 미학이 어떻게 치유의 감각으로 번역되는지를 보여준다. 「꽃 1」에서 “앓고 나면/꽃이 보였다.”는 구절은 고통의 통과 없이 섬세한 인식이 도달하지 않음을 말한다. 상처를 부정하는 대신 상처의 빛을 감각할 때 사물은 제 존재를 드러낸다. 「꽃 5」는 “혼자서 피고/혼자서 져도/외롭지 않다.”고 말한다. 시집 곳곳에서 자연은 비유의 재료가 아니라 생각의 문법을 바꾸는 교사다. 이를 통해 시인은 최단의 어휘로 최장의 관계망을 켠다. 그래서 독자는 문장을 따라가다 어느 순간 문장 밖의 풍경을 본다. 별빛이 아니라 ‘별빛이어서’ 가능한 시선, 꽃이 아니라 ‘꽃이어서’ 가능한 숨결, 바로 이것이 해야 시인이 자연으로부터 배운 문법이다.
해야의 시집 『달이 떴어』는 자연에서 길을 찾기 위한 기도문이자, 자연과의 조응을 통한 진정한 자아의 회복 기록이다. 시인은 문명의 말로 세계를 규정하지 않고, 세계의 고요로 말을 비운다. 소유를 비워 찾게 되는 존재, 잃어버린 정체성의 회복은 그 비움의 용기에서 시작된다. 달과 산, 별과 꽃, 바람과 어둠이 차례로 말을 건네는 동안, 우리의 언어도 느리게, 적게 그러나 더 깊게 움직인다.
시인의 말
청춘의 묵시록
- 바라나니
내 이 한 편의 작은 시가
그대들 어둠을 거두어 줄 수 있다면
그대들 가는 길 밝혀 줄 수 있다면.
어둠 속 하늘의 별이 되어
그대들 눈동자에 빛이 될 수 있다면.
잠 못 드는 밤하늘 달빛이 되어
그대들 가슴 따사로운 벗이 될 수 있다면.
내 이 한 편의 작은 시가
일렁이는 젊음의 푸르른 가슴
붉은 심장에
한 덩이 단단한 무쇳덩이가 될 수 있다면.
굵은 피 흐르는 핏줄일 수 있다면.
그리고 발걸음 망설이는 눈빛에
결단의 한 자루 칼날일 수 있다면.
내 이 한 편의 작은 시가
그대들 싱그럽고 싱싱한 팔다리에
굳세고 탄성 좋은 근육질이 될 수 있다면
뛰노는 바다 물결일 수 있다면.
하늘 향해 날아오르는 활주로일 수 있다면
튼튼하고 곧은 동아줄일 수 있다면
날개일 수 있다면.
그리고 내 이 한 편의 작은 시가
그대들 젊음의 꽃밭에 피어나는
곱고도 뜨거운 노래의 메아리가 될 수 있다면.
가쁘고 벅찬 숨소리의 쉼터일 수 있다면
샘물일 수 있다면.
그대들 삶 겹고 고픈 식탁에
더운 김 오르는 한 사발 국밥이라도
힘내라! 한 대접 고봉 막걸리라도.
한 잔의 따뜻한
커피라도
될 수 있다면.
시집 속으로
오늘 밤도 기다림의 끝은
달이었어.
하늘이었어.
-「지음知音 1」 부분
채워야 할 것 있다고 했다.
비우는 일이라고 했다.
비우는 일로 비우는 일을 비워 채워야 하는.
-「지음 2」 부분
산의 허락은 받았는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나 스스로 그리 못할 양이면
산이 나를 잡아
산에 놓아 살게 해 주는 수도 있다고 하네.
-「산 1 」 부분
무게를 만나러
산에 간다.
무게를 더해 주는
산의 무게.
무게를 내려 주는
초록의 무게.
-「산 2 」 부분
숲은 초록으로 나를 숨 쉬고
나는 초록으로
숲을 숨 쉬고.
-「광학 일기 2」 부분
세상이 나를 훔쳐 갈까 봐.
내가 나를 세상에 훔쳐낼까 봐.
산도 함께 가져갈까 봐.
-「산 6」 부분
배가 되어 떠나가는
별들이 있다.
-「별 1」 부분
어두운 밤. 어두운 하늘. 어두운 비. 내리치는 천둥 번개. 번개의 날빛. 정수리 한가운데, 가슴 한복판에, 두 눈동자에. 받아, 견디어, 버티어 본 적.
-「칼 1」 부분
별이 보이지 않는
밤이 있었다.
나를 찾아 세상 길
떠나야 하는.
-「별 3」 부분
명함이라 일컫는
제법 편리하고도 그럴듯한 이름의 딱지가 있지.
건넬 때마다 속으로 되뇌는 말.
“이것이 제
껍데기입니다.”
-「나 1」 부분
별이 살지 않는 하늘엔
그리움도 살지 않는답니다.
-「별 5」 부분
부서지지 못하고
보고만 왔다.
나에겐 아직 바다가 없다.
파도가 없다.
-「바다」 부분
세상에도 하늘에도 가장 쉽고 가장 어려운
그래서 세상과 하늘 가장 으뜸인
오로지 한 권.
‘나’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책 1」 부분
간곡한 눈빛은
바라보는 그것의 눈빛을 닮는다 하지.
그것의 눈빛을 훔쳐 갖기도 한다고 하지.
간절함 그윽하기 지극할 양이면
하나가 되는 수도 있다고 하지.
-「광학 일기 5」 부분
너 때문 아니다.
나 때문 아니다.
꽃나무 저 혼자 뜨거워
속앓이하는 거다.
-「사랑 3」 부분
너를 앓고 나면
꽃이 보였다.
꽃을 앓고 나면
네가 보였다.
-「꽃 1」 부분
죄라면 그게
죄이지요.
빛을 받아
빛으로 피어
꽃으로 지는.
-「꽃 15」 부분
차례
1부 네가 왔어
지음知音 1/ 지음 2/ 지음 3/ 지음 4/ 지음 5/ 지음 6/ 산 1/ 산 2/
산 3/ 산 4/ 광학 일기 1/ 광학 일기 2/ 산 5/ 산 6
2부 청춘의 묵시록
칼 1/ 칼 2/ 별 1/ 별 2/ 별 3/ 별 4/ 한 번쯤, 이런 일/ 나를 찾으러 /
어둠에 대하여/ 길 1/ 길 2/ 힘/ 나 1/ 나 2/ 촛불
3부 그 밥
별 5/ 별 6/ 길 3/ 길 4/ 길 5/ 바다/ 책 1/ 책 2/ 별 7/ 바닥/
광학 일기 3/ 광학 일기 4/ 광학 일기 5/ 광학 일기 6/ 그 밥
4부 한 사람
한 사람 1/ 사랑 1/ 사랑 2/ 사랑 3/ 사랑 4/ 사랑 5/ 사랑, 그리고 섹스/
앨버트로스/ 끝판왕/ 물/ 연어/ 한 사람 2/ 한 사람 3/
5부 네가 보였다
꽃 1/ 꽃 2/ 꽃 3/ 꽃 4/ 꽃 5/ 꽃 6/ 꽃 7/ 꽃 8/ 꽃 9/ 꽃 10/
꽃 11/ 꽃 12/ 꽃 13/ 꽃 14/ 꽃 15
해설 _ 아직 길이라 불리지 않는 길 위의 순례 127
우대식(시인)
해설 중에서
해야 시인의 시집 『달이 떴어』를 읽으며 느낀 정서적 충격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하는 문제는 시란 무엇인가의 근본적인 물음에서 비롯된다 할 것이다.
근대성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서구 미학의 이론이 지난 이십여 년간 한국의 시론에도 온전하게 녹아들어 왔음을 생각할 때 전통적 제재를 바탕으로 동양적 사고를 형상화한 이 한 권의 시집은 다분히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지음, 사랑, 산, 길, 꽃 등의 연작을 통하여 시적 화자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시적 테마는 스스로 수행의 여정에 있음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종교적 신념과 같은 궁극의 세계를 밀어가는 시적 태도는 시라는 밀교 의식을 행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던져준다. _우대식(시인)
저자 약력
해야
1973년 『현대문학』 12월호. 2회 완료 추천.
추천인: 서정주. 조병화. 신석초.
시집 『달이 떴어』.
bhyou@kongju.ac.kr
해야 시집 달이 떴어
상상인 시선 066 | 2025년 10월 24일 발간 | 정가 12,000원 | 128*205 | 142쪽
ISBN 979-11-7490-018-0(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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