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소개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는 것은 때로 거대한 불행보다 작고 사소한 결핍들이다. 밀린 월세, 식은 밥상, 닳아가는 몸, 무시당한 말, 기다려도 오지 않는 소식 같은 것들이 조금씩 마음을 갉아먹는다. 남호순의 시집 『사랑하고 싶었으나 방이 없었네』는 이러한 결핍의 현실을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가난과 노동, 허기와 고독, 사랑의 실패와 모멸이 그의 시 곳곳에서 발견된다. 시인은 그 어두운 삶의 풍경을 따뜻한 서정으로 감싸기보다 생활의 냄새가 밴 거칠고 생생한 언어로 끌어낸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잘 마른 우울 한 조각”을 이야기한다. 이 표현은 남호순 시의 정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그의 우울은 감상적으로 젖어있지 않다. 오랜 시간 햇볕과 바람에 말린 흔적처럼 건조하고 단단하다. 자신의 상처를 과장하거나 연민에 기대지 않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며 때로 웃음거리로 만든다. 바로 여기에서 남호순 특유의 풍자가 시작된다.
이 시집에서 가난은 가장 근본적인 삶의 조건이다. 「밥상머리 은하수」에서 별은 “마른기침 끝에 뱉어놓은 밥알”이 되고 달은 “허공에 엎질러 놓은 고봉밥”이 된다. 우주의 풍경조차 배고픈 자의 눈에는 밥상으로 보인다. 시인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배부르다는 말”을 “어머니가 지어낸 사나운 거짓말”이라고 표현한다. 그 거짓말 속에는 가난의 아픔과 자식의 입에 밥 한술이라도 더 넣으려는 사랑이 함께 들어 있다.
표제작인 「사랑의 임대차 계약」은 오늘의 가난이 사랑의 형태까지 어떻게 바꾸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사랑하고 싶었으나 방이 없었네”라는 이 시의 첫 문장은 이 시집 전체를 압축한다. 사랑보다 관리비와 보일러와 수압을 먼저 확인해야 하고, 연애의 시간마저 “묵시적 갱신도 없는/임대차 2년”이 된다. 사랑은 마음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머물 방과 생활의 안정, 미래를 함께 꿈꿀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필요하다. 남호순은 사랑마저 자본과 주거의 조건 속에서 흔들리는 시대의 서글픈 얼굴을 날카로운 웃음으로 포착한다.
노동의 문제 역시 이 시집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눈 목目」에서 화자는 “죽을 만큼 수평을 맞춰야겠어”라고 되풀이한다. 자신이 짓는 건물은 반듯하게 서야 하지만 그 일을 하는 노동자의 삶은 처음부터 기울어져 있다. “기울어진 가난”을 쏟아지지 않게 붙들며 살아가는 몸에는 굽은 등과 굳은살이 남는다. 「골조의 타전」에서는 늙고 병든 몸이 낡은 비계와 부실한 골조로 표현된다. 노동의 결과는 건물로 남지만 노동자의 몸에는 통증과 피로가 축적된다. 남호순의 시는 노동의 숭고함을 찬양하지 않는다. 대신 몸이 생계를 위해 얼마나 오래 하중을 견뎌왔는지를 구체적인 감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남호순의 시에는 이처럼 고단한 현실을 견디게 하는 힘이 있다. 그것은 풍자다. 「알랑방귀 미학」은 조직 사회의 아부와 비굴한 생존술을 방귀의 이미지로 풀어낸다. “괄약근은 눈치를 채는 정밀 기계”가 되고, 성공은 “기류를 타는 꼬리 짓”과 관계된다. 「손바닥 주식회사 운세 보고서」에서는 손금과 운명마저 구조조정과 영업이익, 대주주와 파산 같은 자본의 언어로 번역된다. 시인은 현실의 언어를 그대로 끌어와 뒤틀고 비튼다. 그래서 그의 풍자는 비굴한 개인을 조롱하기보다 인간을 비굴하게 만드는 삶의 구조를 겨냥한다.
그러나 그의 풍자의 밑바닥에는 여전히 사랑에 대한 갈망이 함께 한다. 그의 시에는 아직 사랑하고 싶은 사람의 뜨거운 마음이 남아 있다. 바로 그 마음이 이 시집의 우울을 견디게 하고, 가장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희미한 꽃잎 하나를 끝내 포기하지 않게 한다.
시인의 말
이 뜨락의 풍경 속으로 잠입해 기어이 지워지고 싶다
얼룩진 기분이 햇볕의 이빨에 자잘하게 씹히는
풍경 일부가 된다면
언젠가 배고픈 이가 이 뜨락을 지나치다
잘 마른 우울 한 조각을 우연히 발견할 수도 있을 테니까
물론 그것은 배달된 전단지처럼 아주 사소한 일이겠지만
2026년 7월
시집 속으로
달은 식은 죽처럼 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나는 아직 바닥을 보지 못한 우물 하나를
들여다봅니다
-「밥상머리 은하수」 부분
지옥의 입술을 포개는 일은
딱딱한 등이 부딪히는 소리가 안부를 묻는 유일한 타전
-「무당벌레와 무당벌레」 부분
사랑 혹은 감전이 끌고 다닐 불온한 날씨 앞에서
죽음 따위는 한낱 웃음거리라는 듯
전깃줄을 거대한 거문고 줄처럼 튕겨대는 검은 입술이라니
-「까마귀발은 절연체」 부분
봄이 되어 당신 행복한가요, 묻기도 전에
내 안경에는 당신 계절이 습기처럼 차올라
닦아내야 할 것들이 많아지네요
-「영하의 기온」 부분
오늘은 조금만 무겁게 무너져도
좋겠네, 하늘은 낮은데 젖은 것들이
쏟아지네,
-「혼합 강수」 부분
누가 불꽃이고 누가 마른 잎인지 묻지 마세요
그건 불판 위에서 하늘이 바싹 졸아든 다음의 고요입니다
-「가뭄을 구워 먹는 법」 부분
사람들은 정적이라 부르지만
고양이는
검은 생선의 비늘을 긁어내는 중이다
-「달빛 요리」 부분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지방인지 이제는 묻지 않는다
우린 그저 맛있게 오해하고 있을 뿐이니깐
-「날개 알리바이」 부분
우리는 질긴 결을 씹으며
내 안의 가라앉은 바다를 깨우고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을 꿈꾸던
한 짐승의 고독한 비행을 목격합니다
-「붉은 날개의 궤적」 부분
거대한 봄날이 오기까지
누구의 등이 굽고
무릎이 깨졌을지를 생각합니다
-「저 우주적 봄날」 부분
날씨를 먹겠다고 하면
사람들은 웃겠지만
한 점씩 입에 넣으면
혀끝에서 붕괴하는
온도와 냄새의 파편이
나를 낯선 위도의 기억으로 이송시킨다
-「날씨도 맛있다」 부분
완벽하게 조여진 것들은 노래할 줄 모르기에
나는 나사 하나를 잃어버린 채
가장 근사하게 삐걱거리며 당신 쪽으로 걸어간다
-「헐거운 보행법」 부분
마음과 마음을 맞대고
이처럼 다정한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우리 이토록 녹아나도 괜찮은 걸까
-「접점의 향기」 부분
박혀 있는 것들은 제풀에 겨워 신화가 되고
박히지 못한 것들은 죄다 모여 소음이 된다는데
보시라, 하늘의 흉터처럼 아물어 있는
고정된 빛의 오만한 침묵을
-「오해」 부분
땅 밑도 결국 같은 하늘이어서
시든 줄기를 붙잡고 우는 대신
우리는 흙 속에서 살기로 합니다
-「올감자를 캐며」 부분
차례
1부 잠들 수 없는 깃털이 돋아나네
무당벌레와 무당벌레/ 밥상머리 은하수/ 꼬리뼈의 행방/ 까마귀발은 절연체/ 영하의 기온/
혼합 강수/ 낮은 곳의 영광/ 눈 목目/ 가뭄을 구워 먹는 법/ 알랑방귀 미학/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새끼줄 같은 것을 잡고/ 옥수수 수확/ 오한
2부 별빛, 그 시큼하고도 치명적인 도수
노가리 통신/ 달빛 요리/ 밤의 부품이라 생각할게요/ 날개 알리바이/ 꽃잎이 떨어진 줄/
싸구려 별빛의 도수/ 복날 견종 변경/ 붉은 날개의 궤적/ 한통속이야/ 고니의 국경/
지글지글, 징글징글/ 달콤한 감전/ 쑥도다리와 하얀 동굴/ 아무도 없는데
3부 쏟아지는 유정의 불꽃 너머
난 미용실이 쑥스러운걸/ 저 우주적 봄날/ 사랑의 임대차 계약/ 너는 에피소드 산유국/
꼴값도 돈 되면 떨어야지/ 심연의 이력/ 골조의 타전/ 날씨도 맛있다/ 소식은 무슨 놈의 소식/손바닥 주식회사 운세 보고서/ 몸에 쓰는 자서전/ 개꿈의 해부학/ 헐거운 보행법/ 달달 무슨 달
4부 말하지 못한 것들이 얼룩처럼 남는다
북극에는 곰이 남극에는 펭귄이/ 구름은 구름에게 흰 눈을/ 사적인 기상학/ 나무의 골목/
접점의 향기/ 딱따구리 득음/ 빛의 허울/ 오해/ 삼양터널 묵밭에서/
할머니의 냉장고에는 호랑이가 산다/ 뿌리 박힌 집/ 올감자를 캐며/ 개불알 탱탱
해설 _ 결핍의 현실을 견디는 풍자의 힘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시는 가난과 노동과 사랑의 실패와 가족의 상처가 우리 삶을 어떻게 갉아먹는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그 갉아먹힌 자리에서 느끼는 고통을 풍자로 고발한다. 풍자는 이 시집에서 절망의 부산물이면서 절망을 견디는 힘이다. 그리고 그 풍자의 밑바닥에는 아직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다. 바로 그 마음 때문에 이 시집의 어둠은 단순한 어둠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웃음의 칼날을 품은 어둠이며, 희미한 꽃잎 하나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어둠이다.
우울을 말하면서도 우울에 잠식되지 않고, 가난을 말하면서도 가난의 비참함에만 머물지 않으며, 사랑의 실현 불가능성을 말하면서도 사랑의 가능성을 완전히 철회하지 않는다. 이 시집이 가진 문학적 힘은 바로 이 긴장에서 발생한다. _황정산(시인·문학평론가)
저자 약력
남호순
제19회 전태일 문학상 수상
제32회 근로자문화예술제 은상
충북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금 수혜(2022, 2026)
시집 『들리지 않는 발소리』
『사랑하고 싶었으나 방이 없었네』
hosunna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