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소개
강영임 시인의 시집 『햇살이 술이었던가 바람이 춤이었던가』를 읽는 일은 삶의 그늘진 곳을 바라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 시인의 시선은 화려하고 빛나는 것보다, 쉽게 지나치기 쉬운 여린 존재들에게 머문다. 최저시급으로 밤을 새우는 청춘, 인력사무실 앞에서 일자리를 기다리는 노동자, 거리에서 은빛 페인트를 온몸에 바른 채 동전을 기다리는 사람, 그들은 모두 역사책 한 줄에조차 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 삶의 바깥으로 조금씩 밀려난 사람들이다. 강영임의 시는 그들의 고단한 몸과 침묵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 있는 슬픔을 꺼낸다.
「乙에게」의 화자는 “물류센터 편의점 최저시급으로 밤새워도/종유석 더디게 자라듯 꿈들은 더 멀어져”라고 쓴다. 노력하면 꿈에 닿을 수 있다는 익숙한 믿음은 이 구절 앞에서 무력해진다. 열심히 살아도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으며, 꿈은 오히려 멀어지기만 한다. 「엉또폭포에 들다」에 등장하는 인력사무실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격증보다 “기다림의 순번표”다. “일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은 삶 속에서 가난은 계속되고 눈물은 엉겨 붙는다. 그들의 슬픔에는 언제나 구체적인 몸이 있으며, 그 몸은 굽고 휘청이고 기다리고 견딘다.
시집 곳곳에서 발견되는 작고 약한 존재에 대한 애정도 이러한 시선에서 비롯된다. 「희망은 취소되지 않는다」의 ‘실버맨’은 가난을 견디기 위해 페인트 속에 몸을 숨긴다. 소나기가 내리자 “은빛으로 굳어 있던 남자의 시간”에서 수치심이 뚝뚝 떨어진다. 그러나 그는 “동전이 떨어질 때마다 희망을 주워 든다.” 강영임의 시에서 희망은 살아내기에 필요한 작은 동전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의 희망은 더 절실하다. 절망을 모르는 사람보다 절망 속에서 오래 살아본 사람이 희망의 무게를 더 정확하게 아는 까닭이다.
강영임 시인의 시선은 개인의 삶에서 민족과 역사의 상처로 넓어진다. 특히 제주에서 태어난 시인에게 4·3의 기억은 쉽게 지나갈 수 없는 시간이다. 「사월, 가릿당 본풀이」, 「사월 속으로」, 「다랑쉬굴」, 「천남성」, 「썩은 섬」 등에 이어지는 역사적 기억은 이 시집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룬다. “침묵도 섬이 될 수 있다/기억의 빈자리에서”라는 「다랑쉬굴」의 구절처럼, 말해지지 않은 역사는 거대한 침묵의 섬으로 남는다. 시인은 그 빈자리로 걸어 들어가 죽은 이들의 이름과 울음을 다시 불러낸다.
그의 역사 인식은 제주 4·3에 머물지 않는다. 사할린 강제징용의 상처를 그린 「자작나무의 섬」, 임진왜란 당시 잘려 나간 코와 귀의 비극을 환기하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항일비행사 임도현의 삶을 다룬 작품 등은 국가와 민족의 역사가 결국 이름 없는 개인의 몸에 새겨진 상처의 기록임을 보여준다. 특히 “역사책 한 줄에도/기록되지 못할, 이름들”에 대한 시인의 관심은 현재의 노동자와 과거의 희생자를 하나의 시선 안에서 만나게 한다. 강영임에게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죽은 시간을 정리하는 일이기보다 오래 침묵해 온 존재들에게 다시 목소리를 돌려주는 일이다.
이 시집에는 슬픔이 많다. 가난과 노동, 가족의 죽음, 역사의 폭력과 상처가 여러 작품의 근저에 놓여 있다. 그런데도 시집을 다 읽고 난 뒤 마음에 남는 것은 한 줄기 빛이다. 시인이 “확장과 양의 에너지”를 생각하며 “햇살. 불. 술. 나무. 빨강. 초록”을 떠올렸다고 밝힌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둠을 충분히 통과한 사람의 눈에는 작은 불빛도 선명하게 보인다. 이 시집의 슬픔이 희망으로 바뀌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인의 말
확장擴張과 양陽의 에너지를 생각한다
햇살. 불. 술. 나무. 빨강. 초록
피. 땀. 눈물. 통증이 걸어왔다
내게 기꺼이 내어준 찰나적 영원성을
시대의 한 표정으로, 미완의 문장으로
기록하고 싶었다
2026년 7월
시집 속으로
낯선 자의 삶이
훅, 들어와 기울어질 때
경위도 어디를 향해
발걸음
떼고 있을까
-「아파트 승강기엔 좌표가 산다」 부분
울다 지친 문양은 휘었다 둘둘 말려
청춘들
끈 하나 부여잡고
-「新백자철화끈무늬병」 부분
운명이란 물음이
물음표에 가둬질 때
시간은 통에 갇혀
납작 엎드린다
파랑을 갖는다는 건
삶을 받아내는 일
-「운명은 통조림 같다 -Blue」 부분
눈치 없는 소나기 도시를 물들일 때
은빛으로 굳어 있던 남자의 시간은
뚝, 뚝, 뚝
-「희망은 취소되지 않는다 -자카르타의 실버맨」 부분
노랑을 일제히 푼 콸콸 터진 개나리
때로는 고르디우스 매듭도
꽃잎보다 더 가벼운 것
-「매듭의 봄」 부분
침묵도 섬이 될 수 있다
기억의 빈자리에서
-「다랑쉬굴」 부분
낡은 몸 주저앉아 멈춰버린 언어는
때로는 붉었다가 때로는 끊겼다가
-「굴무기궤」 부분
마디가, 마딜 만나야
이름을 갖게 된다
-「서른세 개 척추뼈」 부분
밤이었구요
쓸쓸함을 붙잡고 걷는다는 건
당신 마음 내 마음 차이 나는 온도 탓
-「추어나 푸돗던고 1 -봄밤」 부분
햇살이 술이었던가 바람이 춤이었던가
천기누설 값 치르고 길흉을 안다는 건
때로는
뱉은 말보다
못한 말이 더 많지
-「추어나 푸돗던고 2 -당신에게」 부분
기도에 매달리게 하는 것은 몸의 통증
풍경에 매달리게 하는 것은 맘의 상처
바람이 나를 가르고 죽음은 눈알 꺼내고
-「冬至」 부분
차례
1부 담장 사이에 두고 온 밤
아파트 승강기엔 좌표가 산다/ 가야 위에 눕는 하루/ 新백자철화끈무늬병/ 乙에게 /
운명은 통조림 같다/ 전장戰場/ 엉또폭포에 들다/ 희망은 취소되지 않는다/ 선릉역의 시간
2부 숨겨 놓은 말들이 하나씩 불을 켠다
눈먼 자들의 언어/ 매듭의 봄/ 그것들/ 소쇄원/ 양철 숲/ 당신 이름이 멀어질 때/
땅따먹기/ 탐미의 가면/ 오늘도 개똥을 치운다/ 디지털 여행자
3부 뒤집어쓴 초록은 그 누구도 못 찾게
오월/ 사월, 가릿당 본풀이/ 사월 속으로/ 다랑쉬굴/ 그날, 이후/ 임도현/
자작나무의 섬/ 감쪽같이 사라졌다/ 천남성/ 썩은 섬
4부 흉터가 무늬 될 때
굴무기궤/ 걷는 사람/ 강정/ 돌사람/ 빛나는 것들은 모두 별/ 서른세 개 척추뼈/
추어나 푸돗던고 1/ 추어나 푸돗던고 2/ 추어나 푸돗던고 3/ 추어나 푸돗던고 4
5부 알지 못한 불의 색은 별이 돼
冬至/ 기억하시나요?/ 꽃살문처럼 오래오래/ 불의 다른 이름/ 내소사 솟을연꽃살/
배롱꽃 취한 밤/ 3월, 고란사에서/ 백제인을 만났다/ 목간木簡
6부 어둠의 여백으로 유월이 달아올라
여물지 않은 아름다움/ 발정/ 칠월, 공천포/ 산지천, 그 변주의 시간/ 칠성대/
물메, 백세로/ 절부암節婦岩/ 불귀不歸/
해설 _ 시간의 켜 위에서 쓰기/섹션·제의적 증언 91
신상조(문학평론가)
해설 중에서
강영임의 시조에서 화자와 타자 사이의 좌표는 공감과 연민이라는 축을 기준으로 사회적 이슈들로 집중된다. 일반적 서정이 자연이라는 경전을 마음의 눈으로 들여다보며 관조적 깨달음을 시적으로 승화시키는 데 반해, 강영임의 시조는 그러한 전통적 내면성이 아닌 삶의 현장을 주목한다. 시인은 당대의 현실이 반영된 타자의 상황에 자신의 정서를 투사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이는 단순한 연민의 기록이 아니라 각박한 세상 속에서 이해타산과 효율에 기대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나아가는 이가 타자에게 건네는 다정한 위로다. 공감과 연민의 시선은 대상의 구체적 현실을 변곡점 삼아 심화・확장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그러므로 강영임의 시조는 이 시대의 삶과 현실을 감각적으로 포착하고 조명하는 섹션에 가깝다.
강영임의 시조가 사회의 기억을 보존하고 증언하는 강력한 공동체적 언어 양식이라는 점에서, “햇살이 술이었던가 바람이 춤이었던가”란 시집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술’과 ‘춤’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이자 이승의 시름을 잊게 하는 것으로, 심방이 겪는 영적 도취와 제의적 황홀경을 감각적으로 재현한 것이 아니던가. _ 신상조(문학평론가)
저자 약력
강영임
서귀포 강정 출생
2022년 고산문학대상 신인상
제1회 소해시조창작지원금 수상
시집 『시간은 한 생을 벗고도 오므린 꽃잎 같다』
『햇살이 술이었던가 바람이 춤이었던가』
limsj1128@naver.com
강영임 시집 햇살이 술이었던가 바람이 춤이었던가
상상인 시인선 106 | 2026년 7월 8일 발간 | 정가 12,000원 | 128*205 | 116쪽
ISBN 979-11-7490-066-1(0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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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제주특별자치도와 제주문화예술재단의 ‘2026년 제주문화예술재단지원사업’ 후원을 받아 발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