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소개
나정욱 시인의 시집 『노래야 먼지야 모래야』는 추상적 관념이 아닌 먼지, 모래, 기침, 입김, 발자국 같은 낮고 작은 구체적 존재들로 세계를 파악하고 재구성하는 시집이다. 시인은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세계를 인식하는/존재의 수만큼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짧은 시인의 말은 시집 전체의 사유와 감성을 예감하게 한다. 세계는 이미 주어진 하나의 질서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그것을 바라보고 믿고 사랑하고 견디는 존재들의 수만큼 새로 태어난다.
표제시 「노래야 먼지야 모래야」에서 시인은 “노래에는 모두 먼지와 모래가 묻어 있다”고 한다. 모래밭이 모래밭일 수 있는 까닭은 그 위에 찍힌 발자국 때문이고, 먼지가 먼지일 수 있는 까닭은 그 안에 묻은 기침 때문이며, 노래가 노래일 수 있는 까닭은 누군가의 입김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시집의 생태적 상상력과 맞닿아 있다. 「먼지 예찬」, 「햇빛 농사」, 「뿌리의 춤」, 「녹색의 풀」, 「연두의 세계」 등에서 시인은 인간을 자연 위에 군림하는 존재로 보지 않고, 먼지에서 와서 먼지로 돌아가는 생명 공동체의 일부로 바라본다.
사랑에 대한 사유 또한 이 시집의 중요한 축이다. 「사랑의 행성」에서 사랑은 죽음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순수이며, 「사랑의 탄생」에서는 죽음의 유혹을 견디게 하는 유일한 힘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나정욱의 사랑은 낭만적 미화에 머물지 않는다. 「사랑의 변증법」은 사랑과 거짓말의 관계를 능청스럽게 파고들고, 「다정한 사랑법」은 사랑을 “친절과 존중/그리고 웃음”이라는 구체적 태도로 낮추어 말한다. 이런 겸손함이 오히려 사유의 깊이를 만든다. 사랑은 오늘을 견디게 하는 다정한 형식이며, 죽음과 허무 앞에서도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마지막 힘이다.
시집의 가장 아픈 정서의 중심에는 어머니가 있다. 「사모곡」, 「냄새의 기원」, 「멍우」, 「아흔네 살 우리 엄마」, 「겨울 편지」, 「어머니 전상서」에 이르면 시인의 언어는 더욱 간절해진다. 나정욱의 시에서 어머니는 냄새의 기원, 고향의 탯줄, 삶의 첫자리처럼 자신의 삶의 근원이며 정체성의 발원지이다. 머위를 “멍우”라고 부르던 어머니의 말, 요양병원에 누워 있는 아흔네 살 어머니의 몸, 자식들을 건사하며 타향살이를 견뎌낸 생애는 시인에게 삶의 근원을 되묻게 한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사적인 회한을 넘어, 인간이 어디서 왔고 무엇으로 살아왔는가를 묻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확장된다.
동시에 이 시집은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놓치지 않는다. 「닭들의 나라」는 권력과 대중의 맹목성을 우화적으로 풍자하고, 「팝콘꽃이 피었다」는 전쟁과 뉴스, 소비와 구경의 구조를 불편하게 드러낸다. 「장대한 분노」는 전쟁의 이름으로 어린 생명을 짓밟는 폭력 앞에서 단호하게 “이건 아니다”라고 말한다. 「가난의 힘」은 가난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부유해지면 알 수 없게 되는 인간 이해의 깊이를 말한다. 나정욱의 사회 비판은 추상적 이념보다 구체적 생명과 약자의 고통에 기대어 있다. 그래서 그의 분노와 풍자는 삶의 체온을 잃지 않는다.
『노래야 먼지야 모래야』는 먼지처럼 낮은 것들, 모래처럼 밟히는 것들, 노래처럼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 인간의 흔적을 찾아내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세계는 뜨거워져 생명을 위협하고, 불공평하며 때로 잔인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발자국과 기침과 입김이 남아있어 아직 살 만한 곳이다. 나정욱의 시는 바로 그 작고 희미한 흔적들을 불러 모아,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 시집의 시들은 먼지와 모래를 털어내는 배제의 노래이길 거부한다. 반대로 그것들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시간을 끌어안는 노래가 되고자 한다.
시인의 말
세계는
세계를 인식하는 존재의
세계이다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존재의 수만큼 존재한다
사랑이란 것도 굳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존재한다
2026년 6월
시집 속으로
이걸 사랑이라고 하지 않으면
사랑이란 도대체 이 행성에 있을 수 없다 사랑이
없다면 이 행성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의 행성」 부분
새벽 종소리를 들으며 나는 깨닫는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혈흔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어김없이 만나는
이것이 삶의 엄정함인 것을
종소리로 퍼져가는 음향에 실려 보내는 이것을
나는 시詩라 부르겠다
-「시」 부분
무엇이든 한꺼번에 이루어지면 바람이 되었다
날개가 되었든 날개를 닮은 꽃잎이 되었든 날개가 무진장
부러운 욕이 되었든
-「바람이 부는 이유」 부분
모래밭에 발자국이 없으면 모래밭이 아니듯이
먼지에 붙은 기침이 없으면 먼지가 아니듯이
노래에는 모두 먼지와 모래가 묻어 있다
-「노래야 먼지야 모래야」 부분
내 죽음을 내가 모르듯 죽기 전까지
나는 비석을 세우듯 시집을 세워두고
읽다가 잠든다 꿈에서도 시는
문장의 왕이다
-「시집을 비석처럼」 부분
여름의 깊이를 가로로 펼치면 겨우 석 달이나 될까
석 달 동안 내린 비와 햇빛을 모으면
바다에 이르는 강의 길이쯤 될까
-「여름의 깊이」 부분
지금 내 영혼이 머무는 지점은 내 얼굴의 어디쯤일까
종이 지도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 지점을 갖고 있어 나는 내 얼굴이 그리웠던 것이다
-「얼굴과 지도」 부분
참 멀리멀리 달려온 구름
오늘은 여기서 가볍게 이별하자
눈물 없이도 가볍게 이별하는 구름의
어린 것들!
-「참 멀다」 부분
밤이 되면 뿌리가 뿌리를 세워
강강술래 춤을 춘다 이때만큼은
뿌리가 나무의 손이 되고 발이 되고
나무의 허리가 되어 뿌리의
춤을 춘다
-「뿌리의 춤」 부분
욕을 듣지 않으면 바람의 존재도 없다
욕으로 태어난 존재 그래서
바람 소리를 들으면 욕을 참느라
무던히 애쓰는 바람의 신음을 듣는다
-「바람의 자식들」 부분
시를 쓰기 위해 선택한 시어처럼 나는
풀들에 결박당했다 나를 고문하면서 풀들은
녹색의 시를 완성한다
-「녹색의 풀」 부분
세상이 조용한 밤에 변신을 한다
밤이 껍질을 벗고 아침이 되듯 거미가 변신하여
사람이 되는 밤이다 벗어 놓은 거미 껍질을 뒤집어쓰고
사람이 거미가 되는 밤이다
-「변신」 부분
연두가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었는데
연두가 가득한 강물을 보니
연두를 둘러쓴 물귀신이 덤벼들 것 같은
한여름이다
-「연두의 세계」 부분
사랑을 모를 때는 비밀이 없었는데
사랑을 알게 되니 비밀이 생겼다
다른 사람에게는 비밀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비밀이 아닌 우리의 사랑은
비밀이다
-「쉿! 사랑은 비밀이다」 부분
오늘은 시간의 윗입술 어제는 시간의
아랫입술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떨어질 때
우리는 말을 하고 노래를 한다
-「입술」 부분
빛나는 시의 별 하나쯤은 호주머니에 넣어두고서
만지작만지작하다가 시를 꺼내면 내 손부터
빛나는 보석이 되리니
-「호주머니 사정」 부분
거울 앞에 서면 거울처럼 내가 보이는 것은
거울은 눈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울의 눈」 부분
겨울은 사람들에게 비밀스런
사랑과 죽음을
불타는 나무들처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계절이다
-「겨울에 분명해지는 것들」 부분
차례
1부 날개를 닮은 꽃잎이
어머니 전 바보였어요/ 사랑의 행성/ 시/ 장미의 형상/ 박수의 힘/ 바람이 부는 이유/
노래야 먼지야 모래야/ 연필에 대한 예의/ 먼지의 결혼식/ 닮은 시인들/ 사랑의 편지/
사랑의 탄생/ 혁명 그 이후를 살다/ 시집을 비석처럼/ 죽음으로도 어쩔 수 없는
2부 쉽게 지울 수 없는 간밤의 기록
여름의 깊이/ 사모곡思母曲/ 티라노의 사랑/ 차가운 손들/ 사랑의 변증법/ 먼지 예찬/
닭들의 나라/ 사랑의 이형태/ 얼굴과 지도/ 미인계/ 순례자/ 태화강 선바위/
옛날이야기/ 팝콘꽃이 피었다/ 질투는 신의 몫
3부 그 많은 발자국이 어디서 왔는지
참 멀다/ 흑백사진 속의 그녀/ 정월대보름/ 여름개미/ 쥐며느리 관찰기/ 냄새의 기원/
간절곶/ 햇빛 농사/ 멍우/ 뿌리의 춤/ 아흔네 살 우리 엄마/ 바람의 자식들/
달리역에서 기차를 타던 사람들/ 녹색의 풀/ 정신머리/ 변신/ 연두의 세계
4부 물방울이 세상을 품을 때
사과의 공식/ 쉿! 사랑은 비밀이다/ 세상은 특별히 공평하지 않다/ 입술/ 딸기의 저녁/
장대한 분노/ 가난의 힘/ 겨울 편지/ 달을 보고 웃었다/ 호주머니 사정/ 결혼의 이유/
다정한 사랑법/ 거울의 눈/ 겨울에 분명해지는 것들/ 거북이는 자유롭다/ 어머니 전상서/
그날 토리노 광장에 한 소년이 있었다
해설 _ 먼지와 모래의 노래, 그것은 죽음으로도 어쩔 수 없는 사랑
신상조(문학평론가) 125
해설 중에서
나정욱 시인에게 ‘시’란 먼지처럼 미미한 존재들이 세상에 남긴 발자국을 기록하는 일이다. 시인은 홀로 고독하게 걸어가면서도 타인과의 화합을 시도하고, 시련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인간의 불멸성을 예언자적 목소리로써 증명해 낸다. 삶의 고통과 연대의 흔적을 종소리처럼 세상에 퍼뜨리기, 그리하여 먼지다운 정직함으로 삶의 무게를 받아쓰는 일. 시인이 고백한 ‘시’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그의 시는 먼지가 가진 엄정과 정직으로 세상의 면면한 연대와 유대를 따르겠다는 서약이고, 삶을 온몸으로 살아낸 자가 마땅히 남기고 가는 “모래밭에 찍힌” 실존의 흔적이다.
나정욱 시에서 사유의 변증법이란, 한 작품의 방식과 의미를 넘어선, 시인의 시적 근본 지향까지도 아우르는 이중적인 개념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특이하게도 그의 시는 한 작품에서 품어 형상화한 사유를 다른 작품으로 넘기거나 옮겨서 이 작품이 저 작품을, 혹은 저 작품이 이 작품을 계시하거나 극복하는 일을 달성하도록 돕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이는 “세계는/세계를 인식하는 존재의/세계이다.//세계는 하나가 아니라/세계를 인식하는/존재의 수만큼 존재한다.”라는 ‘시인의 말’에서 이미 암시된 바 있다. 가령 “이걸 사랑이라고 하지 않으면/사랑이란 도대체 이 행성에 있을 수 없다 사랑이/없다면 이 행성의 존재 이유는/무엇일까”(「사랑의 행성」)란 질문은 “우리들 사랑은 왜 이렇게 허약한가”(「죽음으로도 어쩔 수 없는」)란 탄식과 상반된다. 하나의 사유는 작품 이곳저곳에서 연작만큼이나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고, 개별 작품의 의미를 떠나 흩어져 있는 파편적 사유들만을 모아놓더라도 너끈히 모종의 총체적 사유를 몽타주처럼 구성할 수 있다. _신상조(문학평론가)
저자 약력
나정욱
· 1990년 『한민족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 시집 『노래야 먼지야 모래야』(2026년) 『얼룩진 유전자』(2024년)
『라푼젤 젤리점에서의 아내와의 대화』(2021년)
『눈물 너머에 시(詩)의 바다가 있다』(2019년)
『며칠 전에 써 두었던 내 문장에서 힘을 얻는다』(2019년)
· 울산문화관광재단 예술창작지원 사업 수혜(2024년)
· 울산문화관광재단 예술창작지원 사업 선정(2026년)
· 제20회 울산작가상 수상(2025년)
· 한국작가회의,울산작가회의 회원
nhapoo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