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청양고추는 매운 고추의 대명사다. 1983년 중앙종묘가 개발한 품종이다.
칼칼한 맛을 찾는 이들에게는 적격이다. 청양고추는 한국의 씨앗일까?
답은 “아니다”이다. 토종 종자였지만 지금은
세계 1위 다국적 종자기업인 몬산토의 소유다.
때문에 청양고추를 먹을 때마다 로열티를 내야 했다. 현재 품종 보호 기간이 지난
탓에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을 뿐 유전자 원종은 여전히 몬산토에 있다. 종자주권(種子主權)을
갖지 못한
까닭이다.
종자주권은 종자 개발자가 갖는 지적재산권이다. 새로운 종자나 식물을 만들고 키우면
특허와 같이 일정
기간 법적으로 보호해 주는 것이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국제식물
신품종보호동맹(UPOB)이 보장하는 권리다.
한국은 2002년에
가입, 10년간의 유예 기간을 거쳐 2012년부터 적용을 받고 있다.
한국의 종자주권은 1997년 11월 외환위기와 함께
뿌리째 흔들렸다. 국내에서 종자회사
들은 다국적 기업에 희생됐다. 흥농종묘와 중앙종묘는 멕시코의 세미니스에 넘어간 뒤
2005년 몬산토로 넘어갔다. 청원종묘는 일본 사카다에, 서울종묘는 신젠타의 전신인
스위스 노바티스에 팔렸다.
이로써 국내 채소 종자의 67%가량을 외국 기업으로부터 사들여 농사짓는 처지로 되었다.
토종 씨앗이 다국적
기업에 종속돼 상품이 된 셈이다. 농업 정책을 책임진 정부의 무능과
기업이 빚은 농업과 농촌의 참사다. ( 어떤 정부가 이런
매국노짓을 했는가? )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은 베고 죽는다’는 옛말을 송두리째 저버린 꼴이다.
농부는 아무리
배가 고파 죽을지라도 다음해 농사를 위해 종자를 남겨 둔다는 말이다.
씨앗이 생명줄이라고 일컫는 까닭이다. 그렇지만 우리네 밥상은
몬산토의 유전자조작
한 종자에 밀려나고 있다. 국내산 채소나 과일 대부분의 진짜 원산지는 외국이다. 배추,
토마토, 당근, 양파 등도
로열티를 줘야 한다. 제주산 감귤도 마찬가지다.
농업진흥청에 따르면 2010~2014년까지 5년간 외국에 낸 작물 로열티는
819억원이다.
같은 기간 한국이 받은 로열티는 고작 3억 2000만원이다. 2011~2020년 치를 해외 종자의
로열티 총액은 8000억원 규모로 추산된다.세계는 치열한 종자 경쟁을 벌이고 있다.
종자가 국가 경쟁력이자 재산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엊그제 종자주권 확보를 위한 큰 걸음을 내디뎠다.중국의 국영기업인
중국화공
(CHEMCHINA)이 신젠타를 430억 달러(약 52조원)에 인수했다. 신젠타는 몬산토, 듀폰과
함께 세계 3대
종자 기업이다. 현재 30%에 불과한 자국 종자산업의 내수시장 점유율을
2020년까지 60%로 높이겠다는 게 중국의 전략이다.
종자산업의 경쟁력 없이는 농업 경쟁력도 담보할 수 없다. 농산물 시장을 지켜야 하는
것처럼 식량
안보와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다.
종자산업 육성을 위한 우리나라의 정책은 무엇인가?
영남패권주의와
민주주의의 퇴행 .........................................홍 세화
한겨레| 입력 16.02.04.
19:46 (수정 16.02.04. 22:26)
[한겨레]정치, 경제, 법조, 언론, 국방 등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영남패권주의가 관철되고,
그것이 민주주의 퇴행의 핵심 요인임에도 영남패권주의라는 말이 금기시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민주주의의 퇴행은 끝없이 이어지는데, 그들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밀어
붙일 수 있게 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뭐 딴거 있습니까? ‘우리 박근혜 대통령을 위하겠다’, 이런 결심에 따라 온 거 아니겠습니까?”,
“표
찍어 주면 입 싹 닦는 사람도 있더라고요….”유승민 의원 같은 현역 의원들을 ‘저격’하려고
‘배신의 정치’ 심판관으로 활약 중인 최경환
의원 주변에서 나온 말이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했던가?
그들의 눈에 대구에 시민은 없고 오로지
신민(臣民)만이 존재한다.표를 얻기 위해 사무실을
여는 자리에서도 유권자들은 보이지 않고 주군인 박 근혜만 보인다. 그들이 진짜
‘진박’이라면
당선된다고 하더라도 박 근혜 임기가 끝나는 2018년 2월25일 국회의원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선 게 오로지 박 근혜를 위해서니까!
“정부의 수준은 곧 국민의 수준”이라는 토크빌의 말을 다시금 빌리지
않더라도, 민주주의의
성숙은 국민의 성숙, 민주의식의 성숙 없이 가능하지 않다. 국민이 시민이 되지 못하고 신민
으로 남아
있을 때, 성숙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광주 학살 책임자인 전두환의 호를
따서 공원 이름을 붙이거나 단체로 큰절을 올리는 사람
들은 시민이 아니라 신민이다. 박정희 신격화를 비롯하여,주로 영남 지역에서 보여주는
신민
들의 이런 행동은 지식인들에게조차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되는 대신 쓴웃음을
자아내는 우스개소리로 분리수거되는
것으로 마감된다. 오늘날 김천, 문경, 영주에서 읍면
동사무소는 물론 통반장까지 동원하여 관제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다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그런 행동에 대해 영남인들 대부분은 쪽수 많고
힘센 패권세력의
일탈적 권능에 속하는 양 넘어가고 비영남인들 또한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져 있는 게 아니라면 과연 무엇
때문일까?
신민에게서 논리의 정합성이나 합리성을 추구하는 국민주권의식은 애당초 기대할 수 없다.
문제의
심각성은 그들이 신민이되, 선동에 갇힌 허위의식으로든 실제로든 패권을 누리는
신민이기 때문에 자기비판의 가능성이 닫혀 있다는
점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패권의
실제적인 수혜자는 많지 않으며 대부분은 다른 지역에 비해 평균적으로 조금 나은 삶의
조건을 누릴 뿐이다.
밀양 할매들에게 송전탑 문제가 일어나기 전까지 어느 정당에 표를 주어왔느냐고
묻는 것은
그들이 주권자로 거듭나기까지 어떤 고통과 투쟁의 과정을 겪어야 하는지를 알 때 잔인한
일이 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자신의 처지를 그들과 일치시켜 주권자가 될 줄 아는 사회
구성원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영남
내부에서도 패권을 실제로 누리는 세력과 이해관계로 부딪히면 가차없이 짓밟히는 게
대부분의 처지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도 찻잔 속
태풍일 뿐, 영남패권주의는 흔들리지 않는다.
가령 “박근혜와 새누리당에 대한 40%에 육박하는 지지자들은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어떤
일
을 하거나 하지 않을 때 지지를 철회할까?”라고 질문을 던져 보자. 답이 없다! 철회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설령 일시적으로 지지를 철회했다가도 ‘초원복집 사건’ 때 겪었듯이 영남 패권에 위협을
느끼는 순간
“우리가 남이가!”라는 본능이 작동한다. “정치의 종교화”라고 규정하는 것으로
부족한, ‘신민들에 의한 영남패권주의의 관철’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
수도권에 머물고 좁은 인간관계라는 한계가 있겠지만 박근혜 참칭정부 3년이 지나면서
한국
정치와 관련하여 만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민주주의의 끝없는 퇴보 ’이다.
국가기관인 국가정보원의 불법적인 댓글 공작,
통합진보당에 대한 반헌법적인 해산 획책과
관철, 세월호 참사를 겪은 가족들의 진상 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조사 요청에 대한 끈질긴
방해 공작, 누리과정 예산과 관련된 적반하장의 주장,한때 복지를 주장했던 입으로 청년배당
에 대해 “악마의 속삭임이자 달콤한
독약”이라고 말하는 그 뻔뻔스러움,경제민주화를 ‘경제
활성화’로 슬쩍 바꾼 뒤 노동개악 입법 추구, 물대포를 맞아 식물인간이 된 백남기
농민에게
사과할 줄 모르는 후안무치, 한국의 집회 결사의 자유가 침해당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전교조
법외노조화를
국제법 위반이라고 규정한 유엔 인권특별보고관에 대한 거친 반발, 문화방송
(MBC) 등 언론에 대한 전방위적 공작, 곳곳에서 드러나는
현대판 음서제….
민주주의의 퇴보는 끝없이 이어지는데, 그들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밀어붙일 수 있게 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영남패권주의가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확고한 믿음이 아니라면?
진보적 담론들을 주로 외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일
것이다. 계급모순이나 민족모순에 관해
서는 엄청난 분량의 책들이 나오지만, 외국에서 한국 사회와 같은 보기를 찾기 어려운 학벌
문제와 마찬가지로 지역모순에 관한 책이나 담론들은 찾기 어렵다. 기껏해야 영남과 호남의
지역주의를 같은 대열에
세워놓는 양비론적 비판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우리가 ‘팽창적 민족주의(제국주의)’와 ‘저항적 민족주의’를 같은 대열에
놓을 수
없듯이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와 호남의 저항적 지역주의를 동렬에 놓을 수 없음에도 이를
싸잡아 한꺼번에 비판하는
것은 영남패권주의를 온존시키는 기회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영남패권주의의 실상은 18년 독재의 박정희 시기를 빼더라도 그 이후
대통령인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의 출신을 보더라도 금세 알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만 빼고, 스스로 ‘부산정권’이라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하여 모두 영남
출신이다. 이 점만으로도 ‘이게 정상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출신지가 영남패권주의의 ‘성골’에 속한다는 이른바 ‘티케이’에서 멀수록 민주정권에 가깝
다고
덧붙일 수 있겠다. 정치, 경제, 법조, 언론, 국방 등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영남패권주의
가 관철되고, 그것이 민주주의 퇴보의 핵심
요인임에도 영남패권주의라는 말이 금기시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영남패권주의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외면해온 국민에게 김욱 서남대 교수가 쓴
<아주 낯선 상식>(2015·개마고원)의 일독을 권한다. 나는 이 곳에 쓴 글
내용으로 이 책을
지은이에게서 준열하게 비판을 받았는데, 좀 더 섬세한 글쓰기였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게
그 때문은
아니다. 책을 통해 “영남 출신 후보자가 나와야 한나라당(새누리당)을 이길 수
있다”는 주장에 엉겹걸에 동조했던 나 자신이
‘투항적 영남패권주의’에 속한다는 점을 알
아야 했다.그렇다면, 사죄도 하지 않은 전두환 무리를 먼저 용서한 김대중 대통령도 투항
적
영남패권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그만큼 영남패권주의는 강력하다. 30%대의 콘크리트 지지층에, 종합편성채널 등
언론의
융단공세로 부동층에서 10% 정도를 보태 40%대의 지지율을 확보하면 승자독식의 소선
거구제에 힘입어 국회의원 과반
차지가 떼놓은 당상이다. 그들에게 꽃놀이패인 선거제도
를 바꾸라고 말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내놓으라는 격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분명해 보인다. 영남패권주의가 민주주의 실현을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인식에서 그 출발한다면 그다음에는 줄탁동시(啐啄同時)!
영남 내부에서는 민주적 역량을 강화하고 외부에서는
영남패권주의의 정치적 구현체인
새누리당을 고립시키는 것이 바로 그
길이다.
..........................................................홍세화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장발장은행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