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일자: 2023-10-19>
[문화]
제1회 선경작가상 배세복 시인 수상
▶ 선경작가상 수상자 배세복 시인
문장을 지키는 작가의 영역을 지키고자 올해 선경작가상을 제정하였다. 제1회 선경작가상에는 배세복 시인의 『추녀는 치솟고』 외 4편이 선정됐다. 요즘 시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리얼리티의 진실함과 독특한 구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빼어나게 형상화했다. 이야기와 이미지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풀어내는 서사시적 방식이 매력적이었으며 대단한 흡인력을 발휘하고 있었다는 심사평이다.
수상작과 수상소감 심사평은 2024년『상상인』 봄호(제7호)에 소개될 예정이다. 이번 선경작가상 수상자인 배세복 시인은 충남 홍성 출생으로 2014년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몬드리안의 담요』 『목화밭 목화밭』이 있다. 문학동인 회원으로 활동 중이며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다.
제1회 선경작가상 수상작
추녀는 치솟고
수리조합장 집은 방죽 아래 있었고
하늘로 치솟는 추녀를 가졌다
해는 언제부터 저기서 빛났나
다른 이들은 근처 논밭에서 일했다
길을 걸을수록 뜨거워지는 정수리
방아깨비는 끊임없이 방아질했다
글쎄 요즘에도 머슴이 있다네요
갑은 천천히 머슴 머슴 중얼거려 봤다
꼭 일소가 밭을 갈다가
멈추며 우는 소리 같았다
해는 타올라 저수지 윤슬을 바라보면
타버릴 것처럼 뜨거워지는 눈알
그는 이 길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안장은 꺼지고 체인은 늘어났다
저쪽은 물귀신이 있다는 곳이다
귀신은 왜 사람들을 데려갈까
누구는 데려오고 누구는 데려가고
정말 매미를 잡아 날개를 떼도
소리를 낼 수 있을까
왜 산 것들은 죽기 전까지 우는 것일까
갑은 손그늘을 만들어 봤다
여전히 땀은 솟아났다
달걀꽃도 지쳤는지 풀어진 노른자
걸음을 멈추고 치솟는 추녀 쪽을 향해
동그랗게 손나팔을 모았다
아버지, 병이 태어났어요
게타리를 한껏 추켜올리던 을이
갑을 따라 소리쳤다
손톱 끝이 까만 땟국물로 가득했다
매미는 울지 않고
그는 담임 선생을 만나러 갔고
어둑한 논길을 비척이며 돌아왔다
그제야 병은 호두나무에서 내려왔다
나무에는 매미가 무수히 붙어있었다
가을 매미는 울지 않았다
병 말이에요
공부 잘해서 장학금 받는 게 아니라
가난해서 받는 거래요
소문은 뒤란 장독대까지 번졌다
사람은 왜 꼭 말을 해야 할까
병은 호두나무로 올라갔다
여름 매미처럼 같은 말로 울든지
가을 매미처럼 아예 울지 말든지
나뭇가지 사이에 발을 끼우고
손등을 박박 긁었다
피가 살짝 맺혔다
호두나무에 올라오면 온몸이 가려웠다
매미는 울음을 내기 위해
자기 몸의 반을 비워놓는다고 했다
뱃속에 빈 공간을 키운다고 했다
방바닥에 금방 곯아떨어진 그는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아무 말 없었다
추위에 지친 가을 매미 같았다
울지 않는 매미는 답답했다
꾸러미를 내려놓고
꾸러미를 내려놓았다
슬그머니 놓았는데도
방바닥이 제법 울렸다
벌써 저녁상 주위로
모두 둘러앉아 있었다
고갤 돌려 그가 물었다
병은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계집애로 생겨났어야 하는 놈이
사내로 태어나서 고생이다!
병이 우물거릴 때마다
자주 듣던 말이 쏟아졌다
숟가락질을 멈추고
그가 급히 다가왔다
시로 가득 찬 문집이었다
법대를 가야지 글을 쓴다고,
내가 그렇게 당하는 걸 보고도?
굶어 죽기 딱 좋은 놈들이
시 쓰는 놈들이라고
그가 한껏 소릴 높였다
아무렇게나 책장을 넘기다가
입을 동그랗게 말면서
어떤 단어를 거칠게 되뇌었다
병이 시를 써서 가져갈 적마다
어깨를 두드려 주던
지도교사의 이름이었다
장졸들은 날아다니고
손톱 밑에 얼음이 긁혀야
비로소 겨울이었다
소작농이었던 그는
그제야 성주가 되었다
밤중에도 돌아올 줄 모르는 그를
몇 번이고 찾으러 갔다
아버지! 부르자 삐그덕 소리와 함께
담배 연기가 마중 나왔다
장졸을 부리고 있었다
휙휙 바람을 가르던 손 안의 부하들
못 당하겠어! 패한 이웃들이
씁쓸히 장기알을 쓸어 담았다
처음으로 그가 자랑스러웠다
다시 성주가 되기 전의 어떤 계절
그는 길을 떠났다
어디에도 발자국은 없었다
가는 것도 일등이네!
누군가 술잔을 홀짝이며 중얼거렸고
전승을 올리던 그의 표정이 떠올랐다
올해 겨울에도 성을 쌓았다
장기판 같은 논둑 밭둑마다 밤새
장졸들이 날아다닌 흔적 새하얗다
햇빛을 받아 온 세상이
그의 호탕한 웃음, 승전보 같다
이정표가 있었고
안개주의보 속에 이정표가 서 있고
길 끝에 그가 있다는 표식이다
병은 눈두덩을 부벼댔으나
발끝은 돌부리를 지나치지 못했다
어떠한 사실을 잊을까 봐
손바닥에 글씨를 쓰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병이 놀고 있다
짚단을 쌓아논 볏누리를 헤집고
그가 고함을 질렀다
쥐새끼처럼 숨어서 놀지 말랬지!
사금파리가 풀잎과 함께 흩어졌다
어떤 조각은 얼굴을 때렸다
그 밤 병의 손바닥에는
여러 글씨가 적혔다가 지워졌다
안개비가 어느새 는개 되었다
그는 어떤 단어일까
병은 비척이며 일어섰다
길바닥에 흩어져 있는 뜻씨들을
바지 주머니에 모두 담았다
무겁고 차가웠다
어느새 눈꺼풀에 는개가 맺혀
눈을 깜박일 때마다 흘러내렸다
가볍고 따뜻한 뜻씨들을 채워 보았지만
저쯤에서 두고 온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볏누리 속에 갇혀 있었다
빗낱은 조금씩 굵어져
는개가 가랑비 되었다
병은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길바닥 한가운데서 자꾸 미끄러졌다
빗밑이 가벼울 거라는 예보처럼
처음부터 모두 오보였다
수상소감
시가 서정 장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을 때, 역설적이게도 서사가 제게 왔습니다. 시집 읽기를 잠깐 멈추고 오히려 건조한 문장의 소설들을 골라 읽어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서사를 이용해 서정을 끌어오려 시도했습니다. 서사로도 서정이 가능함을, 아니 오히려 더 서정에 목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서정, 서사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동안 제가 유아론에 빠졌던 게 아닌가 생각됐습니다. 독자가 텍스트를 통해 스토리를 상상하게끔 서사를 쓰다 보면 그 속에 서정이 깃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물론 아직은 한참 미숙하지만, 무언가 조금은 알을 깨고 나온 듯한 제 모습에 며칠 잠을 못 이루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무엇이 예술일까를 줄곧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예술의 장르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는데, 그중 미술 분야에 푹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미술 속에는 음악이 있고 문학이 있고 한편 철학도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머리는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주제의 구현 속에 빠지다 보니, 결국 몸도 힘이 쭉 빠져, 이른바 ‘힘이 빠진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미래를 바라보는 시를 쓰기가 힘들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과거를 답습하는 것은 그저 인습이기에 그 구렁텅이에서 벗어나려 노력하였습니다. 그즈음에 만들어진 시가 바로 이 시편들이었습니다. 지쳐있을 때 비로소 당선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더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으로 여기고자 합니다.
시의 길을 열어주신 후, 맑든 궂든 계속 곁을 다독여주셨던 구재기 스승님께 30년 제자로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씀 남기고 싶습니다. 함께 시의 길을 헤쳐나가는 문학동인 회원들과도 술 한잔 나누고 싶습니다. 부족한 제 작품을 뽑아주신 오민석, 박형준 심사위원님 두 분과 <선경산업>과『상상인』 여러분께 깊이 머리 숙입니다.
심사평
리얼리티의 진실함과 서사시적 매력
올해 새로 신설된 제1회 선경작가상에는 200여 명의 시인들이 시집 한 권 분량씩의 작품을 응모하였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은 리듬감 있는 자연 서정에서부터 산문적 흐름 속에서도 이미지와 감각의 다양한 변주를 시도하는 최근 시의 경향까지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아우르고 있었다.
선경문학상과 마찬가지로 선경작가상 역시 예심부터 블라인드 처리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본심에서도 이 방식은 그대로 적용되어 당선작을 선정하고 나서야 수상자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성 시인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상 공모전에서 이름을 블라인드 처리해 진행하는 것은 선경문학상·선경작가상만의 새로운 방식이라 여겨졌고, 심사자들 역시 시인의 이름에 영향받지 않고 작품의 완성도와 신선도만을 가지고 평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오로지 작품을 읽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거쳐 배세복 시인의 「두고 온 아이」가 심사위원들의 이견 없이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 박형준(시인·동국대 교수)심사위원들이 배세복 시인의 작품을 제1회 선경작가상으로 선정한 이유 중에서 제일 큰 부분은 배세복 시인의 작품이 요즘 시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리얼리티의 진실함과 독특한 구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빼어나게 형상화했다는 점에 있었다. 이야기와 이미지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기차가 지나다니는 새우젓 내 나는 읍내’라는 마을사와 그 안에서 한 가족사를 풀어내는 서사시적 방식이 매력적이었으며 대단한 흡인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특히 소작농을 하는 아버지의 삶과 죽음의 과정을 그리면서 그 안에서 가난의 상처를 딛고 ‘말에 예민했던 한 아이’인 ‘병’의 성장사를 객관적으로 형상화내는 기법은 시를 처음 읽는 순간 끝까지 놓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과 흡인력의 원천이었다. 수리조합이 있는 마을과 그 밑에서 소작농을 하던 가난했던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와 ‘그녀’로, 그리고 그 밑에서 자란 자식들을 ‘갑’, ‘을’, ‘병’, ‘정’으로 표현한 것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마을사와 가족사를 객관적으로 고찰하고자 하는 시인만의 독특하고 생동하는 리얼리티의 방법론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제1회 선경작가상으로 선정된 배세복 시인에게 축하를 드리고, 좋은 시를 투고하였는데 아쉽게도 연이 닿지 않아 수상하지 못한 시인들께 응원과 격려를 드린다._ 심사위원: 오민석, 박형준(글)
시상식은 12월 2일(토. 오후 3시) 선경산업 강당(인천광역시 계양구 서운산단로3길 1(서운동))에서 있을 예정이다. 상금은 오백만 원이며 상금 등 부대비용은 선경산업에서 후원한다. 선경문학상은 『상상인』과 선경문학상 운영위원회가 주관하고 선경산업이 주최한다.
미국최대한인포털 뉴욕코리아, John Ki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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